베땅이의 가요들으며 은혜받기 6탄 : 고해 – 임재범

자고로 노래방 가서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이 노래 부르면 망하는 지름길이라 했습니다. 남자들이 제발 노래방 가서 부르지 말아줬으면 하고 여자들이 바라는 노래 1위라지요. 그럼에도 노래 좀 한다고 하는 사람이나 여자한테 잘 보이려는 헛된 생각을 가진 남자들은 오늘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여자를 향한 남자의 사랑 고백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노래의 가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단 한번도 남자와 여자의 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남자도 여자에게 말하거나 고백하는 가사도 없지요. 여기서 주인공은 남자와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와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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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노래 속에 나오는 남자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그런데 이 사제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명과 사랑 사이에서 번민합니다. 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문제는 그 기도가 꽤나 반항적이라는 것이지요.

임재범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듯이 이 사람의 기도는 고분고분하거나 세련된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울부짓고 원망하며 벌하더라도 그 여자만은 허락해달라고 반항합니다. 그의 기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믿음의 기도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의심이나 원망은 우리의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가 가져야하는 믿음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고 의심하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말하지요. 의심이나 원망 같은 것은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고 불신앙에서 오는 것이라고 배웁니다. 말만 들으면 멋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살다보면 우리는 어찌해야할지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생각보다 꽤 자주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아브라함의 믿음 같은 것을 구해보지만 왠지 나는 늘 그 앞에서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참 많이도 하나님을 원망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데서 잘 나가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 한대 얻어맞고 신학을 하게 됐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때론 다른 길로 갔더니 잘 안되는데 신학을 하겠다고 서원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 길은 일사천리로 열어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강권해서 끌어다 놓으셨다는 간증들입니다.

그런데 저의 삶을 돌아보면 한번도 하나님이 나를 강권해서 끌고가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매달리고 하나님은 나를 더 힘들고 더 아픈 곳으로 쳐내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하나님께 이런 원망을 했습니다.

“당신이 당신 일 시키겠다고 불러다 놨으면 적어도 삶은 책임져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들은 기적적으로 잘 도와주신다면서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신앙 간증 많이 들으신 분은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과 함께 하나님의 응답이 일어나면서 ‘짜잔~’하고 은혜롭게 끝날 것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정말 그걸로 끝입니다. 그렇게 내가 힘든 것은 어느정도 자존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저에게서 끝나지 않고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때는… 정말이지 죽을지경입니다. 집안의 어려운 사정에도 몇백만원의 등록금을 내가면서 학교에 다니는 제 마음에는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제 기도가 잘못된 것일까요?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원망을 잠재우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기도들도 나옵니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기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상하게도 성경 안에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안에 예수님이 끼어 있다는 것은 나름 충격적입니다. 성경을 교리대로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원망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미화하려고 노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 앞에 정직한 사람은 그 외침을 쉽게 넘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원망하고 의심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doubts_question_mark-225x300.jpg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우리가 걱정하는 것처럼 불신앙에서 오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내 삶과 관계가 있고 내 고통에 하나님이 책임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불신앙의 결과물은 냉담과 무관심이지 원망은 아닙니다. 아주 작으나마 그 안에 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신을 향해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 ‘당신을 원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원망하는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앞에 계십니다.

우리가 원망과 의심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그 원망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고통이 따르는지,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삶에 여전히 아픔과 모순들이 존재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어설프게 해답을 제시하려 하거나 의심하고 원망하는 자들을 믿음이 없다며 비난합니다. 우리는 욥의 세친구 처럼 끊임없이 답을 주려하지만 그 시도는 늘 실패합니다. 너의 죄 때문이라는 질책도,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위로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들어줄 수 있는 귀와 안아줄 수 있는 팔, 그리고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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