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에 담긴 불편한 욕망

요즘 페북에서는 ‘복음주의’에 대한 사색들이 한창이다. 일부 복음주의 그룹에서 복음주의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그 원인을 찾으려는 탐구들이 등장했고 그 중에 정정훈 편집위원(이하 정정훈)이 복상에 기고한 글이 크게 회자 되면서 그 논의를 증폭시키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 혁신 없이 미래는 없다 – 뉴스앤조이 링크) 정정훈은 현 복음주의 체제를 ’87년 체제’로 정의하며 그 체제의 수명이 다 했고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부터 그 의미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잘 정리하고 문제의식 역시 탁월하다. 일독을 권해볼만한 글이다.

이 글과 관련하여 파라클레 박삼종 전도사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 역시 추천할만 하다. (근본 모순은 87년 체제가 아닌 ‘신사참배 체제’ – 뉴스앤조이 링크) 이 글은 현 복음주의 체제의 문제가 신사참배 사건에 근원하며 그것은 일제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국가 종교적 연합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주의권의 위기라기 보다는 한국 교회의 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다른 중심점을 갖는다.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오늘 내가 쓰려는 것은 이 두가지 글에 대한 답변도 아니고 복음주의의 위기에 대한 또 하나의 글을 써내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페북에서 어떤 이가 정정훈의 글에 대해 보여준 반응에 근원한다. 그는 정정훈의 글을 링크하면서 복음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함을 통해서 쳐낼 것은 쳐내고 ‘복음주의’를 다시 정의하자고 말한다. 소위 ‘복음주의’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문제의식은 조금 다르다.

이 사람들…’무엇이 복음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거 아니야?

성경에 나오는 복음의 개념같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어떻게 주의(~ism)가 붙을 수 있는지 같은 캐캐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논쟁에서 상대방에 대한 신학적 우월성을 갖기 위해 사용하는 복음주의의 용례도 무시하자. 하지만 왜 그들이 자신을 복음주의로 정의하며 끝끝내 복음주의로 남아있고자 하는가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의 무능력함은 통합민주당의 무능력함과 그 양태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교체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세력’을 만들기 위해 통합을 시도한다. 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틀리기 때문에 정작 그 힘은 하나로 묶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가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처럼 오늘날의 복음주의도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 성경관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일념으로 형성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통합민주당처럼 하나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우리가 복음주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수구 기독교와 에큐메니컬 진영의 갈등 가운데 탄생한 하나의 변증법적 존재이다. 즉, 수구와 진보가 없이는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는 유령집단이라는 말도 되겠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칭하는 자들 사이에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즉, 같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양쪽 그룹은 서로의 복음 이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가 사실상 불가능하긴 하지만 대충 복음 전파와 사회 참여에 대한 강조를 그 특징으로 한다고 할 때 그 두가지조차 하나로 엮이지 못한다.

사영리적 복음 전파를 통한 교회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에서 사회선교는 구원받은 자의 삶의 열매로 이해된다. 즉, 그것은 강조되고 필요한 것이지만 선교에 있어서 필수적이지 않다. 그리고 언제든 버리고 돌아설 수도 있고 혹은 그냥 옆에 두고 명분만 세울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중시할 수 밖에 없는 대형교회들은 대부분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아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 복음주의에서 이탈했다고도 하기 힘들다. 사랑의 교회가 교회 건물 크게 짓는 것이 복음주의에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복음주의가 아니라 작은교회주의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 참여적 선교를 주장하는 복음주의 진영에겐 복음이라는 개념 속에 사회참여가 포함된다. 어쩌면 영혼구원보다 전인적 구원이라는 개념이 더 강조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통일이나 해방 같은 에큐메니컬 진영과 대화하고 공유할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진영에게 그런 가치관과 용어들은 영불편할 뿐이다.

이 두가지 복음관이 뭉뚱그려져 복음주의라는 개념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두가지 모두가 중요하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의 운동 혹은 집단적 이념으로 현실화 될 때는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전히 인간적인 예수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긴장을 오랜시간 유지한다는 것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굉장한 피로도를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정훈은 이것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한 진영이 이탈하는 것으로 분석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은 그 두가지의 긴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고 그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가치였다. 서로 다른 것을 지금껏 억지로 하나로 묶어놨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민주통합당 안에 김진표 같은 관료 출신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민주당’이라는 가치를 끝끝내 가지고 가려는 정신상태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노대통령 탄핵 때 처음 촛불이 맞서 싸웠던 대상이 민주당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문제는 이런 명백한 차이에도 그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로 정의하며 그 진영 안에 남아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더 위험해 보일 뿐이다. 어쩌면 이미 87년식의 복음주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복음주의 자체가 애초에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을 구성하려고 노력 중이다. 물론 영향력을 위해 세력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주의라는 애매모호한 단어 속에 자신을 숨기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된다.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정의하면 집단에서 분리되고 세력이 약해지니 애매한 이름 밑에 숨어 무형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꼼수일 뿐이다. 복음이라는 말이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사용되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정정훈은 글의 마지막에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라며 마르크스의 예를 들었다. 감동적이다. 근데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고백이 아닐까? 어떤 복음주의자에겐 마르크스라는 이름조차 껄끄러울지도 모른다. 참고로 나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앞으로 복음주의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내 페북친구들은 대부분 복음주의에 속한 사람들이며 나는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가치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힘이 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에는 언제든 달려가려 노력중이다. 진정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면 사람을 모아 ‘~주의’로 정의되는 집단을 정의하고 그 동질감을 무기삼아 힘을 발휘하려는 패러다임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나꼼수 현상을 통해 배워야할 부분일지도…) 내 맘대로 재구성한 복음주의의 모습 속에서 한기총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오해일 것이라 믿는다.

1 Comment

  1. 홍정길 목사님의 뉴스앤조이 인터뷰를 보면서 나의 확신은 더욱 굳건해졌다. 확실히 그분이 믿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은 다르다. 어느 쪽이 틀리다는 것보다는 다르다. 그것을 같은 것처럼 묶어놓고 비판이 틀렸네 맞았네 하는 것 자체가 웃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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