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 관한 단상

원본글 : http://voix.tistory.com/65
작성자 : Astronome

20세기 신약학계의 핫 이슈였다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은 여러 모로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반성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피상적이나마 내가 이해한 대략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유대교 (흔히 말하는 Second Temple Judaism) 에는 오늘날 카톨릭, 자유주의, 근본주의, 정교회, 진보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등과 같은 기독교 종파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 못지않게 다양한 종교적 공동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두세파, 에세네파, 사해 공동체, 시카리파, 열혈당원, 갈릴리 유대파, 세례 요한파 등등등. 예수파 역시 유대인들에게는 그 중의 하나로 여겨졌을 뿐이다. 

2. 이들 대다수의 종파들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준수나 선하고 착한 행위를 통해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하는 소위 율법주의(legalism)는 당시 유대교의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점을 환기시킨 것이 바로 20세기 후반에 신약학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E. P. Sanders의 학문적 업적이었다. 이 때를 전후로 예수와 바울을 “유대인”으로서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쏟아져 나온다 (맞나?). 

3. 유대인들도 스스로 의로와지고자하는 노력이 아닌 은혜를 강조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신명기에 이러한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예도 있다). 율법은 단시 은혜로 선택받고 구원받은 위치를 간직하기 위한 역할을 했다. 율법을 통해 도덕적으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율법이 해 주었던 것이다. 

4. 유대교 내의 많은 다양성이 있었지만, 유대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공통적인 요소는 특별히 다음의 세가지였다. 

  • 안식일의 준수. 
  • 음식에 관한 규례. 
  • 할례

5. ”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James Dunn은 위의 세가지로 대표되는 boundary marker들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율법의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염두에 둔 율법의 행위는 “선한 행위”가 아니었고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도 아니었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 공고히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자신들만이 은혜를 얻은 거룩하고 성결한 백성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선민의식에 대항하여 바울은 할례받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베푸신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었다고 말한다. Boundary Marker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Dunn은 또한 하나님의 의가 법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의 관계적인 개념이다. 그분이 의로운 이유는 언약의 책임을 다하시기 때문이다. 

6. 톰 라이트는 더 나아가 개신교 내의 전통적인 의미의 이신칭의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주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나누는 벽을 허물었고 그의 주 되심 아래 아무런 민족적, 사회적, 신분적인 구별이 없이 모든 이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편입됨을 말하는 것이 바울의 복음이었다. 다시 말해, 의롭게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를 전가받는 구원론 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됨을 말하는, 정치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포함한 (현재성을 강하게 내포하는) 종말론적이고 교회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물론 이는 이신칭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개인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 교회의 전통을 근본부터 수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다수의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아직 이러한 관점이 받아들여지거나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 나는 아직 읽을 기회가 없었지만, 예를 들어 풀러 신학대의 김세윤 교수도 이 관점을 반대하고 전통적인 바울 해석을 지지하는 책을 두어 권 출판한 바 있다.  비단 복음주의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부 진보 신학자들도 (물론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새 관점에 관하여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들었다. 반면에 전통 해석이 설명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 예를 들어 복음서와 바울, 그리고 야고보와 바울의 표면적 불일치 문제는 이러한 새 관점에서 좀 더 수월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위의 링크된 글에서 언급하듯 바울의 새 관점은 일부에서 오해하듯 종교개혁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문제는 제쳐놓고라도, 적어도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관한 부분은 신약학계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하다. 즉,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고 그들도 은혜를 믿었다. 바울의 서신서를 이렇게 새롭게 발견된 유대교의 context 내에서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는 여전히 신약학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고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의 주장들의 적어도 일부는 복음주의권에서도 앞으로 점진적으로 수용되지 않을지 싶다. 

어쨌거나 나의 눈길을 끄는 점은,  예수와 바울이 비판해 마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신앙 형태는 오늘날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전형적인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1.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나는 하나님께 선택되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2. 구원받은 자로서 나는 성경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나 그 외 “선한 행위”에 속하는 문제들 보다는 다음의 항목들이 가장 중요하다 (1세기 유대인들도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세부 항복들을 다 문자적으로 준수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밑의 항목이 더 중요했다.) 

3. 주일 성수, 세례, 금주 및 금연을 준수하고 성경의 권위, 그리고 무엇보다 보혈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라는 사영리 식 교리를 인정하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하다. 이것들을 잘 지키면 나는 믿음 좋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미국에서는 낙태와 동성애 반대도 여기에 포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크리스챤으로서의 Boundary Marker들은 유대인들의 “할례”와 “안식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신앙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종교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안녕과 생명보다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거룩하게” 간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복음주의 권에서는 끊임없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라는 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배타적 정체성”에 의존하는 이런 방식의 “거룩”은 거룩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의 타락된 본성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표현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추함”이다. 나중에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던 간에 이 논쟁이 교회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되새기게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막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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