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만들기 전에…

시골 마을을 찾아와 가짜 부흥회로 사람들을 속여 돈을 버는 조나스… 그런데 식당 여종업원 마아바는 조나스를 유독 차갑게 대하는데… 그 이유를 궁금해 하던 조나스는 그녀의 남동생이 걷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술 취한 트럭 운전사 짓이었어요.
뒤집힌 차안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걸 네시간동안이나 지켜 봤죠.
의사들은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요.
검사도 해보고, 커다란 주사도 놓고, 아무 소용도 없었죠.
그래서 동생이 저보고 목사한테 가보자고 했어요.
그리고는 목사가 동생을 무대 위로 올렸죠.
기도가 끝났을 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랬더니 제 동생한테 목사가 뭐랬는지 아세요?
이게 다 저 애 잘못이래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면서…
잘 들으세요.
저 애한테 남은 건 믿음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가짜놀음으로 저 애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목회자들은 사람의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고 공감하는 과정에 서툴다. 자신이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해답부터 제시하려는 병에 걸려 있다. 믿음을 가지라는 둥,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둥, 뭘 해보라는 둥… (물론 여기엔 나도 포함된다. 왠만해선 잘 안고쳐진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어디있는지 보지 못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결국 치유 사건의 강조점은 걷지 못하는 소년이 아니라 가짜 목사 조나스에게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싸한 말들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왔지만 진짜 믿음 앞에 정작 기적은 자신을 위해 필요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치유와 기적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지 한쪽에서 다른쪽을 향해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문제의 방향을 180도 뒤집어 놓을 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 문제는 애초에 나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도 내가 쥐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있는 문제가 없는 것이 되지도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 최면이고 자기 기만이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절대 불안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성급하게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은 정작 그 사람의 외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이 원하는 대답은 누구처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면서 뚝딱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하나님이 너의 말을 듣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너를 먼저 돌아보라고 말하기 전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기 전에…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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