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숭배에 대한 던과 허타도의 대화

이 글은 Larry Hurtado 교수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이 왜 이따위냐구요? 네, 발로 했습니다. 대충한게 아니라 실력이 안되다보니 발번역이 됐습니다. ㅋㅋㅋ 원문과 비교해서 읽으시라고 원문과 번역문을 병기하겠습니다. 영어에 대한 살벌한 지적은 저의 영어 공부에 무쟈게 도움이 되니 많이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적할 것이 너무 많으려나?)

전체적인 내용은 이번 영국신약학컨퍼런스에서 있었던 던과 허타도의 발표에 관한 허타도 교수의 정리입니다. 두 사람은 최근 초기 기독교의 예수 숭배 행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아래 내용만 가지고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허타도는 초기 예수 숭배에서 예수라는 인물이 하나님과 구분되는 “최고의 중계자”로써 숭배되었지, 하나님의 다른 형태나 또 다른 신으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주장했습니다. 아직 던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조금 더 예수의 신적 본성을 옹호하는 입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혹시 던의 연구 내용을 아시는 분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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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annual British New Testament Conference (1-3 September, Nottingham), one of the sessions was a dialogue with my long-time friend, Prof. Jimmy Dunn on “The Veneration of Jesus and the First Commandment.” Dunn and I have been in dialogue on this subject over several years, reviewing each other’s publications and trying to sharpen mutually our perceptions of the issues. This dialogue was for me a welcome opportunity to continue this engagement in live-time.

금년 영국신약학컨퍼런스에서 (노팅햄, 9월 1-3일) , 분과 가운데 하나는 “예수 숭배와 첫번째 계명”에 관한 나의 오랜 친구 지미던 교수와의 대화였다. 던과 나는 몇년동안 서로의 출판물을 리뷰하고 이 이슈에 대한 우리의 통찰들을(perception) 날카롭게 다듬으려 서로(mutually) 노력하면서 이 주제에 대해 대화해왔다. 이번 대화는 나에게 이 교전(engagement)을 실시간으로 이어갈 수 있는 환영할만한 기회였다.

We chose to label the event a “dialogue” rather than a “debate”, mainly because we agreed that the aim shouldn’t be to score points in some contest, but instead to come at the evidence and issues with a shared concern for understanding things. That may have disappointed some who prefer minor blood-sport to scholarship. No apologies from me.

우리는 이 이벤트를 “논쟁”보다는 “대화”로 분류(to label)하기로 했는데, 주된 이유는 어떤 컨테스트에서 점수를 주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는데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고 있는 것을 위해 공유된 관심사(concern)와 함께 증거와 이슈를 파악하는(come at) 것이 목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학문에서(보다) 소규모(minor) 유혈스포츠를 선호하는 누군가를 실망시켰을지도 모른다. 나로부터 사과를 바라지 마라.

Dunn’s presentation seemed to me to focus on concerns that devotion to, and beliefs about, Jesus should not be at the expense of the primacy of God, and that Christian faith ought to be genuinely “monotheistic”. These are entirely understandable theological concerns about Christian faith today (with which I am sympathetic), but I was a bit surprised that they seemed to play such a role in a discussion that was to be focused mainly on the evidence of Jesus-devotion in the first-century Christian circles reflected in the NT writings.

던의 발표는 내게 예수를 향한 헌신(또는 그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희생시켜서는(at the expense ~) 안된다는 것과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유일신론적”이어야만 한다는 관심사(concern)에 촛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들은 모두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understandable) 신학적인 관심사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주로 신약 기록물에 반영된 일세기 기독교인 써클안에서의 예수-헌신의 증거에 집중되었던 관심사에서 역할을 다하고(play a role in)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조금 놀랐다.

In my own presentation, I reviewed briefly the constellation of devotional practices in which Jesus features centrally attested in the NT, noted that they are without precedent or analogy in the ancient Jewish setting (the religious matrix of Christian faith), and reiterated my contention that these phenomena reflect a distinctive and noteworthy “mutation” in ancient Jewish devotion to the one God.

나의 발표에서 나는 신약에서 중심적으로 증거되는 예수의 특징들로써의 헌신적 행위의 위상(constellation)을 요약해서(briefly) 리뷰했고, 그것들이 기독교 신앙의 종교적 매트릭스인 고대 유대교의 설정안에서 전례(precedent)나 유비(analogy)가 없다는 것을 언급했으며(noted), 이런 현상이 유일신을 향한 고대 유대교의 헌신에서 구별되고(distinctive) 가치있는(noteworthy) “변형(mutation)”을 반영한다는 나의 논점(contention that~)을 반복했다.(reiterated)

Put another way, the NT writings reflect a distinctive “dyadic” devotional pattern. But it is a “shaped” dyad, Jesus’ significance and place in early Christian devotion rather consistently defined and justified with reference to the will and actions of God (“the Father”). E.g., Philippians 2:9-11 celebrates God’s exaltation of Jesus and the bestowal of “the name above every name”, with the intention that Jesus be given universal acclamation as “Kyrios”.

다르게 말하면, 신약문서는 구별되는 쌍둥이같은(dyadic) 헌신적 양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성된” 쌍(dyad)인데, 초기 기독교 헌신에서 예수의 의미와 위치는 하나님의 뜻과 행동에 관한 목록(reference)과 함께 더욱(rather) 일관되게(consistently) 정의되고 정당화(justfied)되었다. 예를들면, 빌2:9-11은 예수가 “주”로써 우주적 환호(acclamation)를 받게하려는 의도(intention)로, 하나님의 예수를 높이심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수여하심(bestowal)를 찬양한다.

It remains a source of puzzlement to me that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se remarkable devotional practices is not adequately grasped by some. To judge by NT writings, Jesus was not reverenced at the expense of God, but instead as the unique agent and expression of God (e.g., as God’s “Image,” “Son”), and in obedience to the one God, who has designated Jesus as the “Kyrios” to whom this robust cultic reverence is to be given.

이것은 나에게 이런 굉장한 숭배 행위의 역사적 의미가 일부에 의해 충분히(adequately) 이해되지 않았다는 당혹스러움의 원인으로 남아있다. 신약의 기록에 따라 판단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을 희생시키며 숭배된 것이 아니라(reverenced), 하나님의 독특한 중계자와 자기표현으로서 숭배되었으며 또한 이런 강력하고(robust) 열광적인(cultic) 숭배를 받은 예수를 “주”로써 임명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바탕으로 행해진 것이다.

In the historical context, it is a novel development: professing the “one God” of Israel and yet also including as rightful (even required) recipient of devotion a distinguishable, second figure. The NT evidences, not dreams of some future time when a messianic figure may be reverenced (as, e.g., in the “Similtudes” of 1 Enoch), but instead a real and dramatic re-formulation of regular devotional practice in historically identifiable circles of early Christians. Given the special significance attached to worship practice, the programmatic inclusion of Jesus as co-recipient/recipient of their devotion is remarkable.

역사적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유일신”을 고백하면서 여전히 정당한 헌신 수해자(recipient)로써 식별가능한 두번째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전이다. 신약성서는 메시아적 형상이 숭배되었을지모를 어떤 미래 시점의 꿈이 아니라(예를 들자면, 에녹1서의 “similtudes”에서처럼), 역사적이고 확인가능한(identifiable)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헌신적 행위의 현실적이고(real) 드라마틱한 재형성을 증거한다. 예배 행위에 첨가된 특별한 의미를 가정하면((if) given), 그들의 숭배에 있어서 수해자 혹은 공동 수해자로써 예수의 프로그램적(programmatic) 포함은 의미심장하다.

Of course, these first Christians insisted that they remained true to the “monotheistic” stance inherited from the ancient Jewish tradition. But, judging by the actual way that they practiced their worship and larger devotional life, theirs was a distinguishable form of “monotheistic” practice involving the programmatic inclusion of Jesus along with God.

물론, 이 처음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고대 유대교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일신적” 기반이라는 진리에 머물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예배와 더 큰 헌신적 삶에서 행해던 실질적인 방법으로 판단한다면 그들의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예수의 프로그램적인 포함을 수반하는 “유일신적” 행위의 구분되는 형태였다

원문 링크 : http://larryhurtado.wordpress.com/2011/09/19/the-dunnhurtado-dialogue-on-jesus-v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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