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성서조선 113호 1938년 6월]

요새 청년들 대상으로 하는 고린도전서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김교신 선생의 글을 접하게 되어 옮겨적어봅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라고 하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대개 무슨 의미란 것을 짐작하리만치 널리 퍼진 말이다.


기독교 신자는 물론 누구라도 그 뜻을 알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잘 안다고 자처하는 이가 상당히 많다.   더 나아가 그 의미를 알
뿐 아니라 그 사상과 내용을 동경하며 막연하나마 자기도 십자가의 도를 걷고자 하는 사람도 세간에 적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과연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세베대의 아들들 같은 야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또한 적지 않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잔이라도 받을 각오가 있다고 뽐낸다.


‘십자가의 도’라고 번역된 본문을 원어의 순서대로 배치하면 “그 말씀 그러나 그 십자가의”가 된다.   그런즉 ‘십자가의
도’라고 함은 골고다로 가는 도로라는 뜻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십자가에 관한 우리의 설명’, ‘우리의 십자가 주석’ 등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바울이 특히 많이 사용한 말이며 그 뜻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업에서 당한 모든 고난의 모양’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온 생애를 따라가려는 사도 바울의 설명이다.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그 철저하게 겸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생애는 모든 통상적 인간 사상과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그 ‘십자가의 도’를 모든 사람들이 너나없이 사모한다, 믿는다 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일대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인가 친구들끼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는 우리는 서로 놀랐다.


갑 : “오늘날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한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각각 확고한 각오를 가져야 한다.   더군다나
주부라면 신앙 때문에 가장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결심을 하고 굳세게 신앙의 길을 지켜나갈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을 : “살림살이는 있는 힘껏 어떻게든 하겠지만 믿는 가정이 그렇게 참담하게 된다면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욕되지나 않을까?   전도가 막히지나 않을까?”


이와 같은 생각은 ‘십자가의 도’와는 정확하게 180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신자의 사상과 관념을 대언한
고백이며 또 우리 각자의 신앙에 어느 틈엔가 자리를 잡은 신조가 되어 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비통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생활을 하면 병약하던 자는 건장해지고, 없이 살던 자는 부유해지고, 실직했던 자는 취직이 되며, 지위가 낮던 자는 승진되어
신임이 두터워지며, 자녀가 없던 가정에는 옥동자가 생기며, 불화하던 식구는 화목해지는 법인 줄로 안다.   어떤 전도자는 이런
모든 조건을 전도의 미끼로 까지 이용하려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십자가의 도’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2~38)


또 ‘십자가의 도’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누가복음 12:49~53)


이처럼 명백한 ‘신도 모집 광고문’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 누군가에게 속아서 예수를 따르면서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 살림을 바라며,
각자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십자가의 도를 걷고자 하는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를 지나가신 예수의 겸비 고난의 온 생애의 원리 그대로의 생활.   
이것은 거듭 나지 않은
천연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원할 수 없는 길이다.   희망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비극을 전제로 한 길이다.   인간 본연의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상반되는 길이다.


보라, 유태인들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기다린 역사는 참으로 유구했다.   그들은 기대했다.   메시아는 반드시 수도 예루살렘 왕궁의 보좌에서 영광이 황홀한 가운데 오실 것을.


그러나 메시아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객사의 구유에 떨어졌을 때부터 인간의 도와 십자가의 도는 하늘과 땅으로 대립되었다.


예수가 택한 제자와 친구, 예수가 용납한 세리와 음녀, 예수가 힐책한 종교가와 학자 등등으로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는 신분에 상응한
대접도 받지 못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 참담한 시체를 걸기까지 아아,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예상대로, 기대대로 되었던 것이
있었는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   아, 과연 알고 따르려는가.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