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불편한 그의 복귀 (눅 5:12-16)

예수께서 어떤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이 든 사람이 찾아 왔다. 그는 예수를 보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청하였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아라.”
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더 퍼지니, 큰 무리가 그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병행구절 : 마태복음 8:1- 4, 마가복음 1:40 – 45

Web Albums App Upload - 11. 8. 18. 오후 8:22:35 병행구절에서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나병환자를 치유하는 사건에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후 그를 제사장에게 보낸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나병환자를 제사장에게 보냈을까? 그리고 제사장과 나병환자가 만났을 때 이 사건의 성격은 어떻게 변할까?

본문도 증거하고 있지만 이것은 유대 율법에 기록된 나병환자에 대한 규칙을 따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예수가 율법을 지켰다는 것도 이방인이 다수를 차지했던 누가 공동체에겐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읽어보자. 그러려면 우리는 이 이야기 처음에 나병환자가 예수를 향해 외쳤던 외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단순히 병을 고친 이야기가 아니다. 나병환자의 말처럼 그것은 ‘깨끗함’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 주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깨끗한 사람인가? 아니, 여기서는 이 물음이 더 어울린다. 누가 깨끗하지 않은(부정한) 사람인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달리 구약의 정결법은 단순한 종교적 규율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분 앞에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헬레니즘의 확장과 함께 외국의 문화와 종교들이 이스라엘로 전해지던 상황에서 민족적 순수성과 거룩함을 지키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은 더욱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룩함의 문제는 종교적 중심이었던 성전을 넘어 삶의 깊숙한 곳에서까지 적용되도록 요청되었다. 예외가 될 수 있는 상황들을 위해 수많은 조항들이 원래의 율법에 덧붙여졌고, 길을 걸을 때, 집에서 밥을 먹을 때, 율법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거룩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거룩함이라는 목적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부정한 자’들을 공동체로부터 구별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에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앞에서 말했듯 당시 사회 속에서 정함/부정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자격 문제였다. 도둑질과 같은 범죄나 종교적으로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뿐 아니라 시체를 만지는 행위나 질병처럼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들이 부정한 것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다보니 흉악한 범죄자 뿐 아니라 안식일에도 어떤 부자의 포도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 직업 상 시체만지는 일을 해야 하거나 외국인을 상대로 부정한 고기를 도축하는 사람들도 당시 사회로부터 ‘부정한 자’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이 그룹에는 나병환자를 비롯해 스스로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없었던 대부분의 병자들도 속해있었다.

Web Albums App Upload - 11. 8. 18. 오후 10:04:34 당시의 부정함에 대한 혐오는 그저 조심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결벽에 가까운 배타성으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자들은 그 부정함을 씻을 때까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다. 우리가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서기관과 제사장이 강도만난 자를 피해간 이유는 그들이 선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혹시 죽었을지 모를 사람을 만지면 자신이 부정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특별히 나병환자들은 고을밖으로 쫓겨나야 했고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병은 현대에도 그 치료가 어려운 병이지만 당시에는 나병과 부스럼을 구별하기 힘들만큼 나병에 대한 이해나 치료법이 부족했다. 비록 율법에 나병환자에 대한 복귀규정이 있었지만 나병에 걸린 사람이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자연스럽게 이런 구분은 하나의 계층구조를 만들어 갔다.

그들에게 율법은 단순히 종교적 규율을 넘어 사회의 가치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통제하고 안정시키는 도구였다. 이 율법을 통해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불량한 자들을 구분해낼 수 있었고 순수한 것 사이에서 더러운 것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순수성’을 이야기하는 집단이 늘 그렇듯 그것은 그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철저한 배척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런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원래 없었던 것처럼, 때론 없었어야 하는 사람처럼 여겨지던 거리의 나병환자에게 예수가 다가온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만들고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을 보이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만을 가지고 있어서 나병환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의 그리움 같은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반겨주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나병환자였을 때 그를 무시하고 배척하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복귀는 불편한 관계가 하나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복귀한 후에도 그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를 상상해보자. 어제까지 내 몸종이었던 놈이 어느날 비단 옷을 입고 나와 겸상을 하고 밥을 먹는다. 비록 그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변했다 한들 그를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병이 낫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그렇게 문제가 될만한 일은 아니다. 원래 밑바닥 삶을 살았던 사람이 병을 치료받고 여전히 바운더리 밖에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살고 있는 바운더리 안으로 편입시켜야 할 때 일어난다. 여기서 예수가 나병환자를 치료해준 사건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나병은 율법에 그 사회복귀 규정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켜온 (명목상의 구절일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규율때문에 제사장들은 어제까지 더럽고 부정한 사람이라며 멀리하던 한 사람을 오늘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해야 한다.

예수는 성전 문밖에 쭈구리고 앉아있던 인생을 일으켜 정상인의 삶으로 밀어넣는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못한다. 이제 안정은 깨졌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그들 사회의 규칙은 예수의 등장과 함께 뒤집혔다. 규칙은 지켜졌지만 오히려 그 규칙은 자기들을 향한 치명적인 공격이 되어 돌아왔다.

Web Albums App Upload - 11. 8. 18. 오후 10:12:02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도 이런 구조적 소외가 존재한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타고 내리는 지하철을 밤새워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주일날 교회에서 아이들 간식이라며 주문하는 피자를 배달하느라 교회에 가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 이번에 분양받은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기까지 용역과 업자들에게 얻어맞으며 쫓겨난 사람들… 문제는 우리 역시 그들처럼 이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자고로 나병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함’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2000년 전의 낡은 기준은 더 이상 사회 가운데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단어가 없어졌다고 그 구분짓기의 힘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때보다 더 잔인하게 그들과 우리 사이를 구분짓는다. 때로는 ‘루저’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찌질한’이라는 말로, 더 고급스럽게는 ‘서민’, ‘생활보호대상자’라는 말도 있다. 돈, 외모, 능력… 각 사람의 가치에 따라 대접받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이 구분짓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88만원짜리 인생은 88만원짜리 가치로, 2억짜리 인생은 2억짜리 가치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며 그에 따라 덜 가치있는 인생이 사회 밖으로 밀려나고 실패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일이며 오히려 이렇게 각자의 능력 차이에 따라 적절한 대접을 받는 것이 ‘공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물론 TV에서 방영하는 불우이웃돕기 방송을 보면서 인도적인 눈물 한방울 쯤 흘려주고 찌질한 자들을 위해 ARS전화 한통 걸어주는 센스를 갖추는 것은 그들과 나 사이를 더 확실히 구분짖는 적절한 테크닉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선’이라는 핑계 속에 그와 우리를 도와주는/도움받는 사람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복지는 여유있는 자가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선이 아니라 너와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이다.’

그 대상이 어린 아이건 노숙자이건 장애인이건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원래 우리 가운데 속한, 우리와 똑같은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를 부자집 아이 혹은 우리 아이와 구분해서 ‘도와줘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어선 안된다. 가난한 아이에게만 밥을 주자는 싸구려 인도주의는 그들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돈의 문제로 대치시켜 자기의 바운더리를 보호하려는 또 다른 결벽증일 뿐이다.

바운더리 밖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써가 아니라 원래부터 우리의 바운더리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 그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의 복귀는 우리에게 기쁨이 아닌 불편한 복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예수의 복음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규칙을 뚫고 그들을 나의 바운더리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켜려 하던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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