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새로운 비유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실제적으로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논쟁거리는 점점 커지는 것만 같습니다.

  먼저 전제해야 하는 문제는 삼위일체는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예수의 신성을 방어하려는 논쟁 가운데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각각의 기능과 위치 등에대한 논쟁에서 발생한 개념이지 애초부터 존재하거나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교리화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비유를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라는 신적 실체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되어야 하며 삼신론이나 양태론이나 역할론, 시대론과 같은 극단적인 해석으로부터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은 어느정도 양태적이거나 어느정도 삼신적이며 당연하게도 역할론적이며 어느정도는 시대론적입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완전한 삼위의 일체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인생가운데 역사하는 각각의 신적 실체에 대한 설명은 필요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분명히 한다면 삼위일체와 같은 것은 교리가 아닌 역사적 정황과 신앙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차후에 다른 더 좋은 개념이 있다면 마땅히 그 자리를 내어줘야 할 하나의 설명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유는 더욱 말해져야 합니다. 각자의 삶에 자리에서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인식되어지는 하나님의 실존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 더 새롭게 말해져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말이 안되지만 그럴수록 더욱 많은 사람에 의해서 말해져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입을 통해서도 학자의 입을 통해서도… 그것이 삼위일체이든 하나의 하나님의 세가지 얼굴이든 세명의 신이든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실존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있는 장님이라면 코끼리의 모양을 어림짐작이라도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만지고 있는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누군가 만져본 코끼리의 모습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그들이 장님이라면 나 역시 장님입니다. 현대의 지식을 통해서 과거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은 방법이지만 그저 과거에 잘 모르던 시대 사람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우리의 생각도 먼 훗날엔 쓸모없는 경험들로 치부될 것입니다. 내가 그들보다 더 잘알 것이라 여기는 것만큼 교만하고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는 정답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특성을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하나의 기준에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거고 아들은 저거고 성령은 이거다라고 단순히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것이라고 할 때, 혹은 아들을 이것이라고 할 때라는 전제 하에 하나의 위격과 다른 위격의 관계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공기’라고 전제할 때 성령은 공기의 흐름인 ‘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기라고 전제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비인식적 실체의 가장 좋은 예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고 경험될 수 없는 것이지만 존재하고있는 특성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공기의 존재를 느끼게 하며 공기로 하여금 실제적인 영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바람입니다. 공기가 나의 인식과 관계하는 방법은 그 움직임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수동적인 형태의 바람이든 공기의 흐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능동적 형태의 바람이든 그것은 움직임을 통해서 나와 관계하고 영향력을 만들어냅니다. 바람에 대한 비유는 성경 자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가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사도행전 2장 1~2절)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시는 분으로 또 하나님의 숨결로 표현되어지곤 합니다. 실제적인 역사들을 만들어내는 분이시고 내주하시며 직접적으로 인간의 인격과 관계하시는 분으로 이야기되어지곤 합니다.

  반면 성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안으로 제한된 하나님이다. 물론 그의 사역의 유일성이나 역사적 의미까지 표현을 만들어내기 힘든 것 같습니다. -_- 나는 이런 성자의 특성을 ‘압축공기’혹은 ‘산소통’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비유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비유방법이다. 이전에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공기를 압축할 수 있다니… 어딘가 가둬놓고 제한시키고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처럼 당시에 사람들도 하나님의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설명이 상상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사실 지금의 우리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많은 개념들이 이처럼 상상되어지기 힘든 것들입니다. 의인이면서 죄인이라는 인간의 실존도 그러하고 신이면서 인간이라는 예수의 존재에 대한 설명도 그러하며 동일하게 세분이 곧 한분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 역시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우리는 그 긴장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있습니다.

  이전엔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나쁘다 하여 이단으로 정죄하였던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누구라도 그 신적 긴장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삶의 바탕 위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한쪽을 강조하는 대신 다른 한쪽은 소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 스스로는 두가지 모두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대부분 완전한 인간보다는 완전한 신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한다면 그 신비는 어느 누군가에게만 주어진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신비는 수없이 말해지고 또 말해져도 그 깊이를 다 말하기에 부족한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개념 자체를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 이름이 이위일체이든 오위삼체든 아니면 위격이 제외된 단일신론이든 그것 역시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제가 성자를 압축공기에 비유하는 새로운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쓴 이유는 이것이 뭔가 뛰어난 개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글을 써놓고 제가 보기에도 허술하기 그지 없는 그냥 하나의 비유일 뿐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언어도 변했는데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은 아직도 4세기, 16세기, 19세기의 개념과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교회는 과거에 묻혀버렸고 신학도 묻혀버리고 더불어 하나님도 오래된 창고안에 묻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언어로 신학을 하고 신앙을 표현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면 나의 언어로 나의 삶의 말들로 표현되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7 Comments

    1. 성부와 성령에 대한 설명은 양태론이라고 보기 힘들구요. 오히려 삼신론에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하나님으로써의 성부와 그것을 경험케 하는자로써의 성령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성령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한 부분이겠지만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양태론적 영향이 있는 설명방식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위격과 인격이라는 삼위일체의 중요 개념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역사밖의 하나님과 역사안의 하나님을 동일인격의 다른 위격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위격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양태론에 빠지진 않지요. 다만 같은 인격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양태론이 됩니다.^^ (물론 저는 후자를 의도하고 썼습니다. 그러니 양태론이 맞겠지요.) 하지만 이 비유에서 강조한 것은 그것이 다른 위격의 강림이든 동등 인격의 변형이든 결국 신의 역사화, 현실화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이 어느정도는 양태론적이고 어느정도는 삼신론 적이거나 합니다… -_-

  1.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목사님은 “삼위일체는 설명하려고 하는 순간 오류에 빠진다”고 하시더군요. 그냥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하는 것이 최선이라구요.

    1. 분명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이해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삼위일체론은 역사안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성령의 위치를 논쟁하는 가운데 그 균형을 잡고자 만들어 낸 불완전한 개념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만 말하자면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이야기해선 안되겠죠.^^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구요. 그러나 기독교 전통 가운데 그것은 고백하기 때문에, 그리고 고백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면 새롭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삼위일체 자체를 증명하거나 설명해내려는 의도가 아닌 더 많은 불완전한 비유들을 통해 더 풍성한 설명들을 만들어내고자 함입니다. 어떤 설명도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유일한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심에 대해서 말하려면, 또한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하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오류가 있을지라도 더 많이 말해져야 합니다.

      “다른 걸 말하면 오류가 되니 예전꺼를 지키자”거나 “성경 말씀 그대로만 전하자”는 것은 말은 좋아보이지만 결국 천몇백년 전에 어떤 교부가 한 얘기에 머물자는 시도이며 하나님을 죽은자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나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느꼈다면 전하고 선포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게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오류로 가득할지라도…

  2. 음..하나님을 공기라고 하고, 성령을 바람이라고하고, 성자를 산소통으로,,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저도 한번 써먹어야 할 것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3. 성경은 마 28:19의 원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라고 되어 있지 않는데
    먹사들(=신부=교부)이 삼신숭배를 위해 원문을 바꿔 치기 했다.(특히 한국성경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라고 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 있는 원 글을 바꿨고, 삼신을 숭배하려는 수작으로 지어 낸 말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단어들의 뜻은 ‘모두 신’이라는 개념을 첨가한 꼴이다.
    ‘거룩 성’(聖) 자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창조자란 뜻이니 당연히 신(神)이고,
    ‘성령’이란 단어에도 정의(正義)에 의해 (신은 영이시니–) 당연히 신(神)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들’이란 단어의 뜻 자체가 , , 란 뜻이니
    ‘아들’은 당연히 신(神)이 아니다. — 가 어찌 신(神)이겠는가??!!

    마 28:19의 원문은
    ‘아버지’와 ‘성령’은 신이지만
    ‘아들’은 ‘인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라는 구절을 이란 개념이 전혀 없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라는 원 뜻을 변개치 말아야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라는 명령을 받은 모든 사도들은 한경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고, 받은 자들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다. 그런 기록에 없다는 거다.

    1. 예수가 ‘신’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건가요? 삼위일체라는 것이 상황적인 개념이란 말씀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아들은 신이 아닌데, 성령은 신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시는지. 거룩하다는 의미의 ‘성’자가 붙으면 신이라는건지… 그럼 성도도 신인가요?

      예수가 신인지 아닌지는 오랜 역사가 있는 질문이니 여기서 그렇게 이해하시는 것 자체를 거부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esus님의 논리에는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반대로 말해보겠습니다. ‘신의 아들’이 어떻게 신이 아닐 수 있나요? 이렇게 말하면 삼신론인가요?ㅋ

      성경에 교리적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 가운데 의도적/비의도적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개인의 교리 해석을 위해 남용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노력들에 의해 형성된 논의인지 자체를 무시하고 그렇게 단순하게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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