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톰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 N. T. Wright

나는 톰라이트가 싫어요

Web Albums App Upload - 11. 7. 24. 오전 2:52:48 나는 톰라이트를 싫어한다. 언제부터인지 소위 ‘대세’라는 것들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는 나였다. 이것과 비슷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몇 있다. C.S.루이스가 그랬고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그랬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학이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비주류 지상주의에 빠져버린 내 성격 탓이라고 해두자. 그런 의미에서 톰 라이트는 내가 싫어하기에 알맞은 신학자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이 말은 그가 요즘 그야말로 ‘대세’라는 의미도 된다. (톰라이트가 우리 시대의 C.S 루이스라고 선전되고 있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물론 톰라이트를 주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주장하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이하 새관점)’은 샌더스로부터 처음 시작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바울신학의 반대 앞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를 거부당하고 있다. 개혁신학적인 입장에서는 톰라이트를 이단자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한편 그는 비주류라고 하기도 힘들다. 나같은 비주류가 그의 신학적 서술을 보고 있자면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나니 말이다. 이것은 그가 진보진영의 학자들이 비난하는 타종교에 대한 바울 복음의 배타성같은 요소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가 길거리 전도자 같은 신앙을 옹호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같은 비주류 나부랭이가 보기에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서 그는 늘 정통적인 언어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이다.

서평을 쓰자니 비평을 하긴 해야겠는데 글을 읽고 있자면 귀차니즘이 몰려온다. 그의 신학은 뭔가 하나를 건드리면 그가 풀어나가는 신학적 논쟁의 구석구석까지 뛰어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뭔가 하나를 걸고 넘어지려면 그것이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결국 전체를 건드려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연구하려는 열심따위는 없는 나같은 사람이 그런 걸 할리는 없다. 그래서 이 글도 ‘비평’이나 ‘서평’보다는 그냥 끄적거리는 ‘불평’의 글이 될 것이다.

새관점에 대한 간략한 이해

흔히 ‘이신칭의’로 잘 알려진 종교개혁적 신앙은 루터가 고민하던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때문에 개혁신앙의 주된 관심은 개인이 구원받는 방법에 집중될 수 밖에 없었고 루터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바울의 복음을 행위와 믿음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이해했다. 자연스럽게 서신 속에 나타난 바울의 주요 논쟁자인 유대인들에게는 당시 부패한 로마 가톨릭의 이미지가 투영된 행위 구원 신앙이라는 오명이 씌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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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샌더스는 유대교의 신앙이 종교개혁자들의 이해처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순종이었다. 샌더스는 이 두가지 차이를 get into와 stay in이라는 두가지 단어로 구분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율법이란 구원에 얻기 위해(get into)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얻은 자가 그 구원에 머물기 위해(stay in)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샌더스는 이런 신앙을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라이트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한 가족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계획’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아닌 세계를 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get into는 율법 같은 조건에 따른 선별이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성취하는데 실패했고 하나님께서는 참 이스라엘인 한 사람,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역사의 마지막 고리를 끼우셨다.

그 언약을 바탕으로 바울은 마지막 때에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로 들어오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을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렇기때문에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끊임없이 유대교와 논쟁하는 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구원받는 방법에 관한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정결법을 통해 외형적 유대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잘못된 유대교 신앙에 대한 유대교 내부의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중심적인 내용은 샌더스나 제임스던이 말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 더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면 라이트는 ‘언약’이라는 개념을 확대해서 그가 ‘새 출애굽’이라고 부르는 더 커다란 그림 속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 그는 이런 해석을 위해 새관점의 학자들과는 다른 노선과 손을 잡는 듯 보인다.

양다리 걸치기

샌더스나 던과는 달리 라이트는 언약의 개념을 조금 더 정치적인 위치로 가지고 온다. 라이트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포로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때에 야훼가 시온으로 돌아오시고 진정한 포로귀환이 이뤄질 것이라는 신앙이 당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신앙을 형성했다.(여기서 종말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주적 파괴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52장 7~8절)

문제는 라이트가 ‘복음’이라는 단어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일반적으로 새관점 학자들이 취하는 유대적 기원 뿐 아니라 헬라적 기원까지도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헬라적 기원이란 바울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당시 헬라세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용례인 새로운 황제 탄생이나 왕위 계승을 선포하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호슬리나 크로산 같은 학자들이 ‘바울이 반제국적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황제숭배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차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연결된다.

헬라적 기원을 인정함으로써 라이트는 야훼의 귀환/다스림을 로마제국과의 갈등 양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로마의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일반적으로 새관점 학자들의 결론은 정치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보다는 공동체적 혹은 교회론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하지만 라이트의 바울 이해는 조금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한다. 그가 이 책에서 9장을 따로 이 주제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봐도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이 너무 길어져 따로 정리해 볼 예정이다.

불평 늘어놓기

Web Albums App Upload - 11. 7. 24. 오전 3:32:08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해석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런 라이트의 양다리 걸치기가 그의 신학에 공백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일이 그의 신학을 비평하기엔 실력이 안되지만,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이런 종말론 신앙과 바울을 연결시키기 위해 라이트는 바울을 반로마적 성향의 샴마이 학파로 설정하는 무리수를 뒀다. 물론 교회를 향한 폭력적인 핍박이라는 이력으로 볼 때 바울의 성향이 샴마이 학파와 가깝다는 그의 주장은 논리적이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바울을 가말리엘의 문하로 소개하는 사도행전의 기록과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말리엘은 샴마이 학파와 달리 정치적으로 평화적인 입장을 취했던 힐렐 학파의 랍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과 동떨어져 언급됨에도 십자가와 죄에 대한 별다른 설명없이 전통적 언어 속에서 너무 당연하게 연결시키며 넘어가는 문제라던가 그가 이 책에서 빼먹고 있는 율법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의 신학에서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문제도 앞으로 그의 책들을 통해서 내가 설명을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정말 약점이 없는 학자처럼 보인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도 뭔가 잡혔다 싶어서 한참 쓰다가 결국 그의 논리로 돌아와서 글을 몽땅 뜯어고치기를 여러번 했다. 하지만 약점이 없어 보이는만큼 그의 신학이 단단해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그의 신학은 너무 어렵다. 아니, 어렵다기 보다는 낯설다. 그가 여러 책을 통해 친절하고 대중적인 필체로 설명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가 버무려 놓은 이 신학적인 그림이 결코 쉽게 꿀떡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다. 그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마치 그가 복음주의에 수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칭송(?)받고 있지만 사실 그가 그려내는 신학적인 그림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거치는 것인 경우가 많다.

이 서평에서 존 파이퍼와의 논쟁으로 유명한 이신칭의의 문제를 언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단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앞으로 그의 칭의론 개념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책을 읽을 예정이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나서 써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에도 많은 설명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아직 뭔가 말하기엔 그의 칭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나에게 부족한 것 같다. 사실 톰라이트의 다른 책은 보지도 않고 이렇게까지 쓴 것도 너무 많이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싸워볼만한 상대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기뻤던 이유는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책들 중에 ‘새관점’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풀어낸 좋은 안내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임스던의 [바울신학]이 있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그 분량이나 내용이 너무 부담스럽다. 그리고 다른 책들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쓰여지거나 특정한 주제만을 담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새관점’이라는 렌즈를 전면에 내세워 전통적인 관점 혹은 진보적인 관점과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리는 큰 그림을 잊지 않는다. 단점이라면 너무 오래 전 책이 뒤늦게 나왔다는 정도일 것 같다.

이 책의 원제는 “What St Paul Really Said?”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바울에 대해서 1세기의 눈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믿을만한 길잡이이다. 지금껏 그의 책들을 통해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대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신학이든, 진보적인 신학이든 혹은 나처럼 그냥 톰라이트를 좋아하지 않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이 책은 그가 정말 한번 진지하게 싸워볼만한 상대임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7 Comments

    1. 이건 뭐…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댓글이네요. 이런 댓글 쓰시는 시간은 안 아까우신지… -_-;; 이런건 글 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은 알고 쓰신 글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왠만한 댓글은 지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되는 댓글도 잠깐 고민했으나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1. 톰라이트 읽을 만한 자료를 찾다가 들어왔다가, “그냥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그랬죠. 안그래도 후회가 되어 지우려고 다시 돌아왔는데, 벌써 답글을 다셨군요. 사과드립니다. 진심입니다. 아래 댓글 포함해서 이 댓글도 보시는 대로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1. 왠지 두번째 댓글은 ‘난 글도 안 읽고 댓글 달았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네요. 이 댓글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지시면 다시 연락주십시요. 전 왠지 남겨두고 싶네요. 어쨌든 작은거라도 저에겐 블로그의 역사라서요.

          1. 네, 그럼 그냥 남겨두도록 합시다. 글쓴이 자신도 “‘서평’이나 ‘비평’이 아닌 그냥 끄적거리는 ‘불평’의 글”이라고 하신 글에 대해 공연히 뭐라 그런 것이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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