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시편 136편 26절)


시편 136편은 감사에 관한 내용들로 가득한 ‘감사의 시’입니다.
이 시는 원래 회당에서 랍비와 회중이 함께 읽기 위해서 만들어졌거나 그렇게 낭독되었던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형태상으로 볼 때 랍비가 앞부분을 읽으면 회중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화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시를 처음 썼던 사람, 그리고 이 시를 함께 읽었던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요?

이 시에서 등장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특정부분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용어입니다.
대표적인 책들이 에스라와 느혜미야, 그리고 다니엘이 있습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거나 포로기 당시에 기록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 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이 시를 처음 지은 사람들, 그리고 이 시를 함께 읽었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36편은 바벨론 포로기를 그 삶의 자리로 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던 바벨론에서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내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할 때 쓰던 전형적인 문장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장의 원형은 요나서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요나서 1장 8~9절)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진 상황에서 무슨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현실만으로는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이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 느낌이 잘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뒷부분에 나오는 후렴부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가진 ki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이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해줬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감사할 것을 찾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행함이 아닙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것들은 수많은 신 중에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구분해주는 기능을 할 뿐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에 전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아닌 신과 신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패배는 곧 신의 패배였습니다. 전쟁에서 진 백성은 이긴 백성의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이 더 강한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도 내려줄 수 있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제사를 드리는 것도 신을 만족시켜 그 기능을 더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의 능력과 행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나의 실패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신의 실패, 혹은 배반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신의 죽음, 패배, 그리고 신으로부터 버림받음 같은 설명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요구하며 그 이유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그처럼 많은 것을 행하시던 그 때의 인자하심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도 동일하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닌 ‘그는 어떤 분인가?’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행위가 아닌 존재로 인해서 감사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실패는 신의 실패가 아닌 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외침 말입니다.

또한 이 시편은 그 감사의 이유를 회중 스스로의 입으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랍비가 앞부분을 읽으면 회중은 뒷부분을 읽습니다. 본문 전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지는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말입니다.

송명희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시인이 ‘나’라는 시를 쓸 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그 가사를 불러주셨다고 합니다. 집도 가난하고 몸도 불편하여 공부도 하지 못하고 가진 것 없던 송명희 시인이 그 가사를 받아적다가 어느 구절에서 더 이상 적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도저히 그 구절을 이해할 수 없어 쓰지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저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송명희 시인의 손으로 그 구절을 쓰도록 요구하셨고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내 고통은 무언가 특별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라는 요구앞에 내가 왜 감사할 수 없는지에 대한 수많은 이유들을 늘어놓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의 상황은 그가 겪지 못한 무언가 특별한 상황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감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혹 도저히 나라는 사람이 비교도 되지 못할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은 나와 무언가 다른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며 혹은 ‘하나님은 그 사람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자신이 위로받아야 하는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하는지 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여호와로 즐거워해야 하는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우리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지 않습니까? 송명희 시인이 공평하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은 분이 되는 것이었을까요? 이 시편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고백은 하나님을 위한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려 신을 만족시켜야만 기능을 잘 발휘하는 이방의 신들이나 존재를 믿어주면 살아나는 동화속의 요정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무어라 고백하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고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을 우리의 입으로 직접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그 요구로부터 도망가려 하고, 핑계대려 하고, 하나님을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내 삶과는 관계없는 하나님으로, 장농속에 던져놓은 성경처럼 저 구석 어딘가로 치워놓을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나의 연약하고 죄악된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피해 달아나지 않도록 나를 주님 앞에 붙들어 놓는 작업인 것입니다.

내가 쓰러져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이 나의 손을 잡아 끌어서는 성공이라는 문으로 던져넣을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 손을 잡고 기다려주시는 늘 변합없이 나와 함께 걷기 위해 그 자리에서 기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은 수많은 말씀들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펼쳐진 홍해앞에서 모세를 통해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 아들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의 입을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되신 그 하나님,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을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하듯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 바울을 통해서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말씀하신 그 하나님, 다시 오리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오늘 이 시간을 살아가는 바로 ‘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입니다.그리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도 그날과 같이 동일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3 Comments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