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근 바울과 종말론 연구 동향 – 조셉 플레브닉

14.jpg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얇은 책이었지만 맘잡고 앉아서 하루만에 읽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포기해야 했다. 구성부터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었고 사전 지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보니 이것저것 찾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총 5장으로 이뤄진 구성 가운데 1~3장은 고린도전서 15장을 주석해 나가면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1장은 15장 3~5절에 위치한 ‘비바울적 삽입구’에 대한 해석을 담았다. 주된 내용은 이 부분이 바울의 표현인지 아니면 바울에게 전해진 것인지, 전해진 것이라면 어디에 속한 것인지, 바울이 이 인용문을 부활을 이야기하는 첫 부분에 삽입한 이유는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더 세밀하게 각 용어의 의미와 범위까지도 논하고 있는 점에서 책 두께에 비해 분명 많은 내용을 담으려 노력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비바울적 삽입구를 다루면서 부활현현에 대한 논쟁까지 다루는 것은 조금 오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부활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가 ‘역사적 예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중간에 내용따라가기가 조금 어려웠다.

2장과 3장은 책에서는 독립된 목차로 구성했지만 사실 15장에서 내용 전환이 일어나는 35절을 경계로, 앞부분과 뒷부분의 내용을 분리해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큰 주제보다는 산발적이고 파편적인 내용들이 뭉쳐있다. 굳이 내용을 나눠보자면 바울의 논리적 전개를 따라 2장에서는 부활(혹은 예수의 부활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3장에서는 부활 이후(혹은 육신의 부활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고 요약해볼 수 있겠다.

4장에서는 본문이 고린도전서에서 데살로니가전서로 바뀐다. 조금 더 이른 시기의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면서 이전에 주석적인 패턴이 아니라 조금 더 자신의 책인 [Paul and Parusia]를 인용하며 결론을 도출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근심이 무엇이었는지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바울이 생각한 파루시아 즉, 주님의 오심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하나하나 밝혀간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읽을만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기존의 학자들이 파루시아의 이미지를 고대 로마 황제의 도시방문(아드벤투스)에서 찾는 것에 반대하며 출애굽기의 시내산 임재와 70인역의 묵시적 언어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듀퐁의 견해를 소개한다. 이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크로산의 [첫번째 바울의 복음]에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설명되어 있던 이미지를 뒤집는 것이라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학문적으로도 바울의 사상적 배경을 헬라 문화 속에서 찾던 관행(?)을 부정하고 유대적 배경을 강조하는 최근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읽어볼만한 것 같다. 플레브닉은 기존의 학설들이 파루시아에서 ‘끌어올림’의 주체가 퀴리오스(주님)임을 간과했다는데 듀퐁과 의견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플레브닉은 듀퐁의 견해가 갖는 난점들도 소개하면서 균형을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플레브닉은 종말의 묵시적 이미지의 기원을 예수로부터 찾으려는 예레미아스와 일부 학자들의 시도들이 시종일관 데살로니가 교회의 근심 즉, 문제의식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바울이 어떻게 이 근심을 해소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책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끌어올림’의 이미지가 데살로니가 교회로 하여금 부활 때의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가 있다는 오해를 만들어 냈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이 근심에 대한 해명과 위로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이론이 명쾌하게 이해가진 않지만 그만큼 책의 지면이 허락하는 것은 아니니 플레브닉이 논의의 중심을 ‘데살로니가 교회의 근심’이라는 논리적 문맥속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점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이해하고 넘어가자.

마지막 장인 5장의 문제 구절은 빌립보서 1:23이다. 여기서 바울은 지금까지 언급해왔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부활과 변화 그리고 주님과의 연합 사상과 어긋나는 것 같은 언급을 한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이 말은 마치 죽으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주님 곁에 있게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원래(혹은 초기) 바울 사상에서 드러나지 않거나 반대되는 것이라는 점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바울의 종말론이 후기로 가면서 영지주의적인 이해로 변화해갔다고 주장한다. 플레브닉은 물론 전체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의 변화는 없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확언하면서고 특정한 이슈에 따른 명료성, 중요성, 긴급성이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여지를 남긴다.

전체적으로는 작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충실히 담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몇몇 학자를 지나치게 따라간다는 느낌이다. 최근 연구 동향이라고 하기엔 공평하게 다뤄지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블랭크라던가 라이트의 입장은 거의 대부분 수긍하는 편이고 불트만을 비롯한 일부 학자에 대해서는 불필요할 정도의 반감을 보이는 듯 하다. 뭐 그럴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불트만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읽는 동안 쫌 짜증은 났다.

또 다른 것은 원문의 문제이기보다는 번역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부 문장이 한글로 읽기에 매끄럽지는 못했다.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 중간 ‘이건 뭐지?’ 싶은 문장들이 있었다. 반면 이건 분명 원문의 문제로 보이는데, 목차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큰 목차 구분은 이해할 수는 있으나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세부적인 목차로 들어가면 내용이 목차 구분을 뛰어넘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목차가 바뀐다고 내용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고 읽는다면 뒤통수 맞기 좋다. 그렇다고 내용이 뒤죽박죽인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

뭐 쓰고나서도 대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CLC에서 출판한 비슷한 시리즈에 비해서는 약간 처지는 경향이 있지만 바울 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참 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두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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