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도 올챙이 적이 있지 않았겠는가?

14.jpg 죠셉 플레브닉의 [최근 바울과 종말론 연구 동향]을 읽다가 정리해 봐야 할 것 같은 내용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고전 15:12)

이 구절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에 대해 말하게 되는 계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고린도교회 가운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득 갈라디아서의 그림을 떠올린다. 즉, 자신이 가르친 복음으로부터 돌아선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꾸짓고 있는 듯한 어감 말이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줬건만 그딴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정도의 느낌이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어투와 고린도 교회의 그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정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부터 돌아섰을까? 고린도 교회가 부활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떤 학자는 그들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육신의 부활을 경시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는 그들이 부활의 의미를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연합에서 찾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12절과 19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논증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논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린도교회를 변호해야할 이유가 생긴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5)

이 문장은 15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구절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본문은 바울의 것이 아닌 초대교회에 통용되던 공통된 신앙고백의 형식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특히나 여기서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라는 구절은 랍비 문헌에서 인용문을 표시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형식이다. 물론 인용문의 범위에 있어서 이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5절까지를 인용문으로 본다.

바울은 초대교회의 고백문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초대 교회의 공통적인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가르쳤을까?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고백문의 내용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있어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도 이것과 관계된 바울의 신학적 발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학자는 바울의 신학이 그가 예수를 만난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와 함께 완전하게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뭐… 그럴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형성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바울의 모든 신학적 주장이 그의 다메섹 체험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그것이 완전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가는 문제가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한권의 책 속에 담아가지고 다닌다. 시간적인 간격이나 지역적인 차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바울의 신학이 마치 평면위에 펼쳐진 기독교 신앙의 청사진이라도 되는냥 착각을 한다. 모든 것이 완전한 그림을 가지고 세례받을 때 읽는 문답서처럼 모든 상황에 대한 해답이 그의 머리속에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바울 서신은 하루 이틀에 걸쳐 쓰여진 것도 아니고 한 곳에 진득하니 눌러 앉아 쓴 것도 아니다. 전체 성경의 형성 과정에 비해서는 짧은 기간일지 몰라도, 한사람의 인생으로 보자면 그다지 짧지 않을 시간에 작성되었고 글쓴이의 상황도, 읽는 청중의 상황도 서로 다른 서신들이 뒤엉켜 있다.

바울이 처음부터 고린도교회에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쳤을까? 고린도교회는 그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복음을 버리고 돌아선 것일까? 물론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우리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울의 생각이 고린도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당시 성도들에게 가르칠만큼 신학적으로 구체화되어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그가 가르친 복음을 상기시켜 주는 부분에는 이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가르쳤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중심적인 논쟁이 되고 있는 15장을 시작하면서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17.jpg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고린도 선교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50~52년으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난 57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5~7년의 시간이 짧은 시간일수도 있지만 바울처럼 많은 곳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참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헬레니즘 문화의 전성기에 있던 지중해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그는 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더 많은 문제 상황들에 부딪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지혜를 구했을 것이다.

그 결과 바울서신의 대부분은 각 교회의 상황에 대한 대답이다. 특히나 고린도전서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린도교회 가운데 있었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만큼 애매한 문제들도 있었다. 바울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떤 것은 문제를 만나 고민하는 가운데 구체화된 것들도 있을 것이다. 많이 양보해서 모든 신학적 해답이 처음부터 그에게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고린도 교회에 모든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성경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든 바울의 신학적 발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없는 것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든, 이미 알고 있던 것의 확장이든, 아니면 그 속에 있던 무언가의 구체화이든, 바울서신 가운데 나타나는 바울의 신학은 일관적이기보다는 발전하며 더 똑똑해지고 더 세련되진다. 이 말은 어떤 바울의 초기든 후기든 우리가 ‘바울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완성된 체계적 교리이기 보다는 ‘길 위의 신학’ 즉, 미완성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플레브닉은 그의 책에서 다른 학자들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슐리어와 블랭크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현재의 신비적 연합에서 보았다. 이 연합은 이미 완성이다. 죽을 때에도 이 연합은 멈추지 않고 몸이 없이 계속된다. 따라서 몸의 부활은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 견해가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견해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미래의 생명을 부인한다고 생각한다.

부활에 관한 논쟁 가운데 바울은 죽은 자를 위해 세례받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신교 신학의 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울이 죽은 자를 위해 받는 세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옥을 인정하는 가톨릭에서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 신학에서는 문제가 된다. 어떤게 맞을까?

난 죽은 자를 위한 세례에 회의적이다. 그럼 나는 바울을 부인하는 자가 되는가? 아니면 바울이 사실은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인정하지 않지만 정황상 그런 척한 것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난 바울 서신 가운데 바울이 말년에 보고 허허 웃었을만한 것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노학자가 쓴 [내 글보고 내가 웃는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이전에 자신의 부족함이 담긴 글들을 보면서 세월의 무게가 깊이 묻어나는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을 바울을 생각하면 그의 글들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진다. 로마서를 쓰던 시절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는다면 아마 율법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너무나도 매몰차게 갈라디아 교회를 몰아 세웠던 자신의 터프함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의미 없다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그랬듯 우리의 신학도 ‘길 위’에 있다. 나는 바울이 우리보다 훨씬 먼 길을 큼직큼직한 발걸음으로 걸어간 사람이기에, 또 그의 발걸음이 너무나도 곧바르게 십자가를 향하고 있기에 그의 걸음은 우리가 신뢰하고 따라가기에 충분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교리화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해석되고 새롭게 이해되고 때로는 반대되고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배웠던 바리새파의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섰던 용기처럼, 유대인들로 이뤄진 예루살렘의 교회를 향해 이방인 선교의 가치와 자신의 사명을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길 위’에 있어야 한다.

– iPad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2 Comments

  1. ^^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저는 바울의 옛관점 지지자 중에 하나입니다.
    암튼 재미있게 읽었구요! 아 글중에 마지막부분~^^
    ‘개신교 신학의 난점가운데 하나가 죽은자들를 위해 받는 세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쓰신 부분에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요~

    그런데 고전 15:29절이 어떻게 해서 바울이 죽은자들의 세례를 인정한 것으로 보시는지요?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부활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그들의 엉뚱한 관습에 대한 언급정도 일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1. 앗… 부족한 글에 답글도 달아주시고… 감솨합니다. 쓰시는 글 꼬박꼬박 잘 받아 보고 있습니다. ^^ 물어보신 것에 대해서는 바울이 그것을 그냥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적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바울은 죽은자를 위해서 받는 세례를 언급하면서 부활이 없다면 왜 세례를 받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바울이 그냥 잘못된 습관을 언급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다른 잘못된 것을 근거로 사용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엔 본문 속에서 바울이 직접 비판하고 있지 않은 개념이기에 전통에 기대어 성경을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 죽은자를 위한 세례를 긍정적인 문맥 가운데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째 쓸만한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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